과거의 무수히 많은 일들이 선택, 취사되어 배우는 것이 학교에서의 역사책이더군요.
예전에는 남한 대토벌 작전.. 책에 나오지 않았죠.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왜군 2만명이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왔었다는 것도 예전 역사책에서는 나오지 않았고..
남한 대토벌 작전은 일본에서 붙인 명칭이고, 실상은 전라도 의병 학살.....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6314
남한 대토벌 작전 [南韓大討伐作戰]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두 달에 걸쳐 진행된 전라남도와 그 외곽 지대의 반일 의병 전쟁에 대한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1907년 군대 해산이 계기가 되어 제3단계 의병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곳은 전라남도였다. 이에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해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이 지역 의병을 진압했다.
제1단계 작전은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광주·영광으로 이어지는 지대,
제2단계는 고흥·광주·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도서 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당시 양민과 민가까지 살육·방화·약탈함으로써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고, 103명의 의병장이 희생되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보성·낙안·순천을 경유하는 광양·하동까지의 도로 작업이었다. 이후 의병들은 만주로 옮겨 가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접하고, 의병에 대한 책이 어떤 것이 있을까 살펴 보다가
대한 제국기 호남의병 연구...이 책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 책에서, 자위단에 대한 것이 나오는데..... 약간만 옮겨보면....
1. 자위단의 조직
자위단은 일제의 의병진압책 가운데 하나로서, 의병전쟁이 가장 거세었던 시기인 1907년 11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전국에 걸쳐 조직되었다. 1908년 2월 말 자위단 수는 총 1,990개로, 이는 전국의 면 단위에 1개씩 조직한 것과 거의 맞먹는 숫자였다. 이와 같이 자위단은 거대한 규모의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자위단은 일진회가 조직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래의 기록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더욱 창궐하자 일진회는 의병을 진정시키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각 도에 사람들을 파송하고 무기를 가지고 스스로를 지킨다 하여 자위단이라 이름하였다.
1907년 후반 이후 의병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이 무렵 친일세력들은 제각각 의병대책을 개진하였다. 일제는 그 가운데 일진회의 의병대책에 관심을 보였다. 주지하다시피 일진회는 대표적인 친일단체로서, 의병들의 처단대상이었다. 1907년 7월부터 그 이듬해 5월 사이에 일진회원 약 9,260명이 의병에게 피살당하였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한지라 일진회가 의병진압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1907년 9월 19일 일진회는 의병을 진압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특별 총무원회를 개최하였다. 회의를 마치면서 부회장 홍긍섭은 의병을 강력히 비판함과 동시에 고종의 퇴위를 지지하고 이완용 내각을 옹호하는 내용의 <거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10월이 되자 일진회는 지방의 상황과 의병활동의 조사를 목적으로 전국에 30명의 회원을 파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수립한 의병진압책을 일진회는 10월 하순 내각과 법부에 발송하였다. 나아가 회장 이용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자위단을 조직하자고 건의했으며, 이완용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같은 내용을 요청하였다. 11월 6일 이토 히로부미는 부통감 및 한국에 주둔 중인 군 수뇌부와 함께 자위단 개설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일제는 자위단을 조직하자는 일진회의 방안을 채택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일진회가 자위단을 조직하였다고 보도하였고, 앞에서 인용한 김윤식의 기록도 신문기사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하지만 황현은 "일진회가 왜와 통모하여 자위단을 창설하였는데 이는 의병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썼다. 그는 자위단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2. 자위단의 활동
자위단은 단원의 인적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위단 명부, 호구조사에 필요한 호적부, 구휼자 명부, 자위단에 관련된 제규정, 경보지, 금전출납부, 단비징수장 등 각종 장부를 만들어 관리하였다.
단장은 경찰,헌병,군대 등의 지휘를 받아 단원을 감독하고 단무를 처리하였다. 이를테면 단원을 소집하여 인원을 파악하고, 단원에게 호구조사,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의 회수, 의병 정찰 등을 지시하고, 유사시에 이러한 사항을 군경기관에 즉시 보고하였다. 또한 자위단 내의 동정을 파악하고 단원의 명부를 작성하여 보고하는 일도 모두 단장의 책임이었다. .........................
자위단의 주된 활동은 의병의 침입을 막고 그 소재를 수색하는 순라와 경계 활동이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지침이 매우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
일진회가 자위단 조직을 세력강화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자 일제는 일반 주민들에게 자위단 가입을 강요하였고, 군경기관은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일제는 강압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단기간에 전국의 면방사마다 자위단을 조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주민들이 자원하여 자위단에 가입한다고 표방하였다. 미국 총영사 사몬스 Thomas Sammons는 주민들이 자유 의사로 가입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 통감부에 문의하였다. 그는 자국의 개신교 선교사의 서한에 근거하여, 일제에 자위단에 가입하지 않은 주민들을 체포하는 이유를 밝혀 달라고 요청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사들이 자위단의 가입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였고, 그 때문인지 자위단의 규모는 방대하였지만 결속력이나 조직력이 강하지 않았다. 자위단의 활동 역시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자위단이 본격적으로 활동 중이던 1908년에 의병활동이 가장 거세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더욱이 자위단은 활동을 빙자하여 수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특히 일진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경향신문] 1908년 1월 3일자에 실린 논설 < 자위단을 인하야 악을 행함>에 그러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자위단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진회원들이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주민들이 그들을 일본군보다 더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진회원들은 단발을 강제로 시행하였으며, 자위단 가입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의병이라 몰아붙여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였다고 한다.
자위단을 빙자한 일진회원의 행패가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는 [경향신문] 1908년 2월 14일자 <자위단 때문에 못살겠소>에 잘 나타나 있다.
자위단 창설 초기에 일진회원들이 주민들로부터 쌀을 거두어 가고, 자위단장과 부장의 출장비를 3~4천 냥이나 빼앗았다는 내용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3. 한국인의 대응
의병들 역시 자위단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일제는 전국에 걸쳐 자위단을 조직하였고, 그해 12월 중순에 이완용 내각은 귀순조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의병이 귀순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활동을 묻지 않고 이른바 '면죄문빙'을 주어 귀가시킨다는 것이다. 일제는 의병들에게 회유책을 제시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자위단을 만들어 의병의 활동기반을 없애려는 계획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을 근절하려는 일제의 의도는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자위단이 의병을 막아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위단을 처단하는 의병항쟁이 더욱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위단은 적어도 1년 이상 존속한 듯하다.
.... 자위단 설립시 일진회원들은 적극 참여한 반면, 일반 주민들은 대체로 비협조적이었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사와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일부 기독교 세력과 자위단이나 일진회의 처단에 앞장선 의병들이 반자위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후반에 이르러 자위단은 거의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을 진정시키려던 일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이 전개한 반일활동이 그만큼 거세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자국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서론 부분의 글에 보면....
의병은 일제의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투쟁한 세력이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5년 이후에 크게 증가하였다. 의병 전쟁이라 일컬어진 그들의 투쟁은 1910년 8월의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위축되었지만,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그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한편 국내에서 활동하던 일부 의병들은 간도와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이른바 '북계책'에 의거하여 국외에 항전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훗날 독립군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와같이 의병은 20여 년 이상 줄기차게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정확한 규모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07~1911년에 활동한 의병 수는 총 14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또한 일제는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학살된 의병의 숫자를 약 1만 5천 명으로 집게하였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당시 의병의 규모는 매우 방대하였고 활동 또한 활발했으리라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호남지역의 의병들이 눈에 띄는 활동을 보였다. 전라도 지역의 의병에 대한 중요성은 일찍부터 언급되어 왔다. 박은식 (1859~1925)은 "대체로 각 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는데, 아직까지 그 상세한 사실을 얻을 수 없으니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박은식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 군경기관의 통계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1908년 전라도의 의병은 일본군경과의 교전횟수와 교정 의병 수에서 전국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6.6%와 59.9%를 차지하였다.
여기에 한말 의병 중에서 전라도의 의병항쟁에 대한 것...자세히 나와 있네요...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353
더욱이 전라도 의병은 “동에서 치면 서로 달아나고, 남에서 치면 북방으로 흩어지고 또 출몰상황이 대개 야간을 이용하고 때로는 대담하게도 주간에 소수의 군대 헌병을 공격하기도 한다.”며 진압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1908년 이후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라도 의병의 탄압에 나섰다. 그들은 1월에는 10개 부대로 진압작전을 전개한 이래 2월에는 15개의 이른바 연합토벌대, 심지어 특설순사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의병의 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150회의 군사작전을 자행하여 의병 756명 전사, 포로 700명, 부상 수백명의 피해가 발생했는데도 의병의 기세가 일시 꺾였다가 다시 재연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註275)
일제측이 실토하듯이, 전라도 의병은 “어느 한 지방을 습격하려고 할 때에는 미리 일시를 기하여 실행하고, 목적을 이루면 다시 집합지와 일시를 정한 다음 몇 사람씩 분산하여 양민으로 가장, 우리의 예봉을 벗어나는 것을 상례”로 한 것처럼 유격전에 매우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전라도 의병들이 자유자재로 유격전술에 능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학농민혁명 이래 농민군의 투쟁역량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폭도들의 행동은 극히 교묘하여 백주에는 양민을 가장하고 공공연히 군청 소재지를 배회하면서 관서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호기를 잡으면 곧 자객적 행동을 감행, 총기 탄약 재화를 약탈하고 혹은 허를 틈타 저격 내습하는 등 그 은현 출몰을 미리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순사주재소는 거의 전부가 습격을 당하였고, 양민을 위협하여 조세를 횡령하고, 재류 일본인 및 그 사역使役 하에 있는 조선인은 대개 폭도의 독수毒手에 목숨을 잃어 다년간 사업 경영을 포기하고 그 근거지로 퇴각하여야 하겠금 되었으므로 농업이 번성하였던 전라 양도는 이제야 바야흐로 황무지화하게 되었다. 註276)
전라도 의병들이 일제의 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침략기구와 일본인 이민자의 구축에 적극적이었으며, 행동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유격전에 능숙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일투쟁의 열기는 1909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전라남북 양도는 전년부터 계속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남도에서 더욱 심하였다.” 註277)고 한다. 결국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전라도 의병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란 미명하에 추진되었는데, 가히 호남의병대학살사건이라 불릴 만큼 일제의 군사작전은 야만적이고 잔혹하였다.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전라도 의병은 회복 불능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은 물론이다.
<대한 제국기 호남 의병 연구 > P.395
일제는 전라도 주민들이 청일,러일 전쟁시 일본 군대의 용감한 활동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과소평가한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전라도 주민들은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을 격퇴한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일제의 침략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제는 전라도의 산간벽지에서 연해도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유린함으로써 전라도의 주민들로 하여금 "일본군의 용감한 무위(武 威)에 경탄 ,진율"케 해서 "일본군의 역사적 명예회복과 제국의 위신"을 확보해야 한다고 공언하였다.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일제의 군사작전은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침략과 수백 년 전의 복수심까지 결합됨으로써 이미 잔학성이 예고된 것이었다.
이에 일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군사작전을 수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다. 이를 위해 한국주자군사령부에서는 전라도를 관할하는 남부수비관구의 모든 병력을 임시한국파견대로 교체,편성해서 '작전'에 투입하였다.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356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의 전개와 결과
전라도의병은 1908~1909년 사이에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의 진압에 나섰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이들을 초토화하기 위해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 ; 이하‘작전’’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의 ‘남한’은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전라남도 지역을 의미한다.
일제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유독 전라도에서 전개된 배경과 진압과정, 그리고 결과 등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
이라는 자료집이 특히 주목된다. 이 사진첩은 일제가 전라도의병의 진압을 기념하기 위하여 1910년 도쿄에서 발간한 것이다. 이
밖에도 ‘작전’에 관한 상당량의 문헌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것만 보더라도 일제가 전라도의병의 진압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일제는 처음에 전라도의병을 전멸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안을 세운 듯하다. 하나는 보부상褓負商을 이용하여 진압하는 방법이고, 註56) 다른 하나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부상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의병측 피해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이른바 ‘이한제한以韓制韓’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사 직전에 호남지방 보부상들의 반대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갔다. 註57) 결국 일제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라도의병의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작전’은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참혹하기 그지없이 추진되었다.
일제는 스스로‘작전’의 명칭을 ‘대토벌’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교반적攪拌的’ 방법에 의해 전라도의병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대규모의 군사작전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의미한다. 즉‘대토벌’이 군대를 동원한 수색이나 포위작전을 통한 단순한 진압작전인데 반하여 ‘교반적’방법이란 대규모 군대를 일정지역에 투입시켜 마치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상대를 포위·교란하여 초토화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닥치는 대로 살상을 일삼고 방화하는 이른바 초토화전술을 전라도의병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註60)
먼저‘작전’의 기간과 시기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약 40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1~2기의 성과가 미진하여 10월말까지 약 15일 정도 더 연장되었다. 註61) 일제는 제3기를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되, 제1~2기에 해당하는 지역에 병력을 재차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9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체포되거나 전사한 전라도 의병의 약 절반 정도는 9월 하순에 발생하였다. 註62)
일제의 작전구역은 전라남도 전체와 전북의 남부 및 경남 하동 일부가 포함된 섬진강 이서以西 지역으로,‘작전’에서‘남한’은 주로 전라남도를 지칭한다. 따라서‘작전’대신에‘1909년 호남의병대학살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작전’에 참여한 주력부대는 임시한국파견대 2개 연대로서 약 2,260명의 규모였다. 대규모 병력을 일시에 투입했기 때문에 소요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註63) 예컨대 임시파견대에 책정된 예산이 61만원이상이었지만 그도 모자라 예하부대에서는 경비의 부족을 호소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인 시설 소유자와 인부들은 사용료와 노임을 일본인에 비해 1/3 수준밖에 지급받지 못하였다. 그마저 예산이 없을 때에는 지방 관청에 지시하여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에 종사시킨 경우도 많았다.
...........................요컨대 전라도 의병이 연해 도서 지역까지 확산되자 일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일시에 투입하여 초토화하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진압작전을 실시하였다. 일제 스스로 대전쟁이라 일컬을 정도였는데, 이른바‘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1909년 호남의병대학살사건’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로써 대한제국기 후기의병을 주도했던 전라도 의병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에 일제는 경제적 침투를 비롯한 병탄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 또는 자수한 의병들은 해남-하동간 도로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일제의 교통로 확보에 이용되는 비극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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